신라인들의 신앙과 예술이 응축된 문화유산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와 어우러져 웅장하게 서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입니다.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석탑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신라인들의 깊은 신앙과 예술적 감각이 응축된 문화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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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중심을 지키는 석탑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에 건립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당시 신라의 중심지였던 충주 지역의 번성을 상징합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불교 문화가 크게 꽃피었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석탑은 불교 신앙의 상징이자 왕권을 과시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웅장한 기단과 7층의 탑신
높이 14.5m의 거대한 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기단은 넓게 펼쳐져 안정감을 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넣어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탑신은 층층이 쌓여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탑신의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치솟아 있어 역동적인 느낌을 자아냅니다.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넣어 웅장한 탑신을 견고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탑의 정상에는 이중으로 포개어진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놓여 있어 일반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유물
1917년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어, 탑이 처음 세워진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다시 사리를 봉안하는 2차 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탑이 단순히 건축물을 넘어,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신앙심을 모으는 성스러운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그 독특한 건축 양식과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많은 연구자들과 역사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석탑은 신라의 건축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예로,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탑의 각 층은 정교하게 조각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마다 다른 조각 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각 기법은 신라 시대의 예술적 발전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탑의 구조는 당시의 건축 기술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석탑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논란과 보존 노력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그 웅장한 규모와 독특한 양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동시에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너무 높은 탑신 때문에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일제강점기 시절 보수 과정에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의견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그 역사와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또한 그 주변의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냅니다.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와 어우러져, 석탑은 마치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자연과의 조화는 신라 시대의 건축물들이 자주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로, 당시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조화를 추구하는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결론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단순한 돌탑을 넘어, 신라인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더욱 빛나는 이 석탑은 우리에게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앞으로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잘 보존되어 후세에까지 전해져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