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흥왕의 야망이 담긴 창녕 척경비, 역사를 품다

진흥왕의 야망이 담긴 창녕 척경비

신라의 영토 확장을 향한 열정과 당시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창녕 척경비. 561년, 신라 진흥왕은 빛벌가야를 정복하고 이를 기념하여 척경비를 세웠습니다. 이 비석은 단순한 기념비를 넘어 신라의 강력한 확장 의지와 당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 자료입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출처: 국가유산청


신라의 서진을 향한 발판, 창녕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와 같은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마치 부채살의 꼭지처럼 전략적 요충지였던 창녕은 신라의 영토 확장에 있어 필수적인 곳이었죠. 진흥왕은 16년(555)에 빛벌가야를 병합하고, 5년 뒤에는 대야주와 합쳐 비사벌군으로 만들어 신라의 영토를 더욱 확장했습니다.


척경비, 단순한 기념비를 넘어

척경비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제목 대신 '척경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토를 확장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죠. 하지만 비문에 기록된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을 보면 순수비의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진흥왕이 직접 이곳을 순시하며 백성들을 살피고 영토 확장을 기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문 속에 담긴 역사의 비밀

비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이 닳아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후반부는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비문에는 진흥왕의 통치 이념과 포부, 그리고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신하들의 명단은 직관, 직위, 소속 순으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과 신분 제도, 사회 조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대가야 멸망 직전 세워진 비석, 그 의미는?

척경비가 세워진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561년입니다. 이는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발판으로 삼아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백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던 정치적인 의도를 보여줍니다.


삼국사기를 보완하는 역사 자료

척경비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완하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비문에 담긴 정보를 통해 우리는 신라 진흥왕 시대의 사회, 문화, 정치 등 다양한 측면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척경비의 보존과 연구

창녕 척경비는 1962년 국보 제33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비석의 높이는 162cm, 너비는 174cm, 두께는 30~51cm로,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겼습니다. 비문은 육조풍의 해서로 씌어졌으며, 각 행 18~27자씩 모두 27행 643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문의 전반부는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지만, 후반부는 비교적 명료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척경비의 역사적 의의

창녕 척경비는 신라 중고기의 관제, 신분제, 사회 조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비문에 기록된 신하들의 명단을 통해 당시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과 신분 제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는 신라의 통치 구조와 사회 조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또한, 비문에 나타난 진흥왕의 통치 이념과 포부는 신라의 영토 확장과 정치적 목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역사 속으로의 시간 여행

창녕 척경비는 단순한 기념비를 넘어 신라의 영토 확장 과정과 당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척경비를 통해 우리는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신라의 흥망성쇠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